맨위로가기

도슈사이 샤라쿠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도슈사이 샤라쿠는 18세기 후반 일본 에도 시대에 활동한 우키요에 화가로, 배우의 초상화와 가부키 극장 장면을 주로 그렸다. 그의 작품은 과장된 표현과 배우의 개성을 강조하는 독특한 화풍으로 특징지어진다. 샤라쿠는 약 10개월 동안 140점 이상의 작품을 제작했으나, 짧은 활동 기간과 독특한 화풍으로 인해 당시 대중에게는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의 정체는 오랫동안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으며, 노 배우 사이토 주로베 설을 포함하여 여러 추측이 제기되었다. 샤라쿠의 작품은 19세기 말 유럽에서 재평가받았으며, 20세기 이후 서양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우키요에 화가 - 우타가와 히로시게
    우타가와 히로시게는 에도 시대 후기 우키요에 화가로, 풍경화 스타일을 확립하여 『도카이도 오십삼차』, 『에도 명소 백경』 등의 대표작을 남겼고 서양 인상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 우키요에 화가 - 스즈키 하루노부
    스즈키 하루노부는 에도 시대의 우키요에 화가로, 다색 목판화 기법인 니시키에를 발전시켜 우키요에 발전에 기여했으며, 미타테에 양식으로 에도 시대 생활상을 담아낸 섬세하고 서정적인 작품을 남겼다.
  • 에도 시대 사람 - 고미즈노오 천황
    고미즈노오 천황은 1596년에 태어나 1611년 즉위하여 1629년 양위한 일본의 108대 천황으로, 막부의 통제 속에서 권위 실추를 겪었으며 도후쿠몬인과 결혼하여 많은 자녀를 낳고 저서를 남겼다.
  • 에도 시대 사람 - 히가시야마 천황
    히가시야마 천황은 레이겐 천황의 아들로 1687년부터 1709년까지 재위하며 겐로쿠 문화의 전성기와 조정과 막부의 원만한 관계, 황실 재정 안정 등 안정적인 시기를 보낸 후 천연두로 사망했다.
  • 신원 불명자 - 김정주 (2010년)
    김정주(2010년)는 김정은의 장남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며, 대한민국 국정원에 의해 아들임이 확인되었으나, 자녀 정보가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아 정보가 제한적이다.
  • 신원 불명자 - 사토시 나카모토
    사토시 나카모토는 익명의 인물 또는 집단으로, 비트코인을 설계 및 개발하고 2008년 백서 발표와 2009년 소프트웨어 공개를 통해 비트코인 네트워크를 시작했으며, 2010년 중반 프로젝트에서 은퇴했으나 그의 업적은 암호화폐 시장과 블록체인 기술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도슈사이 샤라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국적일본
분야우키요에
활동 기간1794년 - 1795년
작품

2. 정체

1844년 고증학자 사이토 겟신(斎藤月岑|사이토 겟신일본어)이 저술한 《증보 우키요에 유고》(増補浮世絵類考|증보 우키요에 유고일본어)에는 샤라쿠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샤라쿠사이(写楽斎|샤라쿠사이일본어)는 속칭 사이토 주로베(斎藤十郎兵衛|사이토 주로베일본어)라고 불렸으며, 핫초보리에 거주하면서 아와국의 주후(州侯) 하치스카씨(蜂須賀家|하치스카 가문일본어)를 위해 일하는 연기자였다.[11]

이후 사이토 주로베 설 외에도 김홍도 설, 호쿠사이 설 등 다양한 설이 제기되었다.

2. 1. 사이토 주로베 설

1844년고증학자 사이토 겟신(斎藤月岑일본어)이 저술한 《증보 우키요에 유고》(増補浮世絵類考일본어)에는 '''샤라쿠사이(写楽斎일본어)'''에 대해 '''속칭(俗称)은 사이토 주로베(斎藤十郎兵衛일본어)'''로 핫초보리에 살며 아와국의 주후(州侯) 하치스카씨(蜂須賀家일본어)가 고용한 연기자라고 기록되어 있다.[11] 하치스카씨는 도쿠시마번의 번주 가문으로 핫초보리에 저택이 있었으며, 샤라쿠의 그림을 출판했던 쓰타야 주사부로(蔦屋重三郎일본어)도 핫초보리에 가게가 있었다. ‘도-슈-사이’(東洲斎|とうしゅうさい일본어)라는 이름은 ‘사이-토-주’(斎藤十|さいとうじゅう일본어)라는 이름의 순서를 바꾼 것이면서 동시에 동쪽 섬이었던 핫초보리를 암시하는 말일 가능성이 있다.

오랫동안 사이토 주로베의 실존을 확인할 수 있는 사료가 발견되지 않아, "샤라쿠"는 다른 유명한 화가가 어떤 사정으로 사용한 변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샤라쿠 다른 인물설"이 많이 제기되었다.[13] 다른 인물설의 후보로는 우타가와 도요쿠니, 가부키도 엔쿄,[14][15][16] 가쓰시카 호쿠사이,[17][18][19] 기타가와 우타마로,[20] 시바 코칸,[21] 타니 분초, 마루야마 오쿄, 나카무라 코조,[22] 도이 유리,[23] 산토 쿄덴, 짓펜샤 잇쿠, 타니 소가이,[24] 쓰타야 주사부로,[25] 서양인 화가[26] 등 많은 인물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연구를 통해 사이토 주로베의 실존이 확인되었고, 핫초보리에 살았던 사실도 밝혀졌으며, 헤이세이 시대에는 다시 샤라쿠 = 사이토 주로베 설이 유력해졌다.

  • 노악사의 공식 명부인 『사루가쿠 분겐초』나 노악사의 전기 『중수 사루가쿠 전기』에 사이토 주로베가 기록되어 있다.
  • 하치스카 가문의 고문서인 『하치스카 가문 무족 이하 분겐장』 및 『어 료코쿠 (아와와 아와지) 무족 이하 분겐장』의 "어역자" 항목에 사이토 주로베의 이름이 있다.
  • 에도의 문화인에 대해 기록한 『제 가문 인명 에도 방각 분』의 핫초보리 항목에 "호 샤라쿠사이 지조하시"라는 기록이 있어, 핫초보리 지조하시에 "샤라쿠사이"라고 칭하는 인물이 살았던 것이 확인되었다.[27]
  • 사이타마현고시가야시의 정토진종 혼간지파 오늘산 호코지[32]의 과거장에 "핫초보리 지조하시 아슈전 내 사이토 지량(랑)병위"가 분세이 3년 (1820년) 3월 7일에 58세로 사망하여, 센주에서 화장되었다는 기재가 1997년에 발견되어, 아와 번에 섬기는 사이토 주로베라는 인물이 핫초보리 지조하시에 살았던 것이 확인되었다.


이상의 것으로부터, 아와의 노악자인 사이토 주로베라는 인물이 실존했던 것은 틀림없다고 생각되지만, 사이토 겟신이 기록한 샤라쿠가 사이토 주로베라는 기술을 확실하게 뒷받침하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33]

2. 2. 김홍도 설

한국에서는 샤라쿠 별인설(別人説)이 여럿 제기되었는데, 그중 작가 이영희가 1998년 일본에서 출간한 저서 《또 한 명의 샤라쿠(もうひとりの写楽일본어)》에서 주장한 김홍도 설이 가장 유명하다. 이 주장은 김홍도가 정조의 명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쓰시마섬의 지도를 그리고 에도에서 샤라쿠로 활동했다는 내용이며, 김홍도와 샤라쿠 모두 발가락이 6개인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는 점을 근거로 한다. 이 설을 기반으로 한 웹툰도 있다. 그러나 김홍도가 샤라쿠로 활동했다고 추정되는 기간 동안 연풍 현감으로 있었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있어 이 주장은 반박된다.[75]

2. 3. 기타 설

우키요에 화가들은 사회적 지위가 낮았고, 개인적인 기록이 드문 경우가 많았다. 샤라쿠는 이러한 세부 사항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예외적인 경우이다. 샤라쿠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많은 노력이 있었으나, 50개 이상의 설 중에서 널리 받아들여진 것은 없다.

샤라쿠는 노 배우, 서일본 출신의 시인, 심지어 호쿠사이일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1776년의 하이쿠 이론 및 미학에 관한 책에는 샤라쿠에게 귀속되는 두 편의 시가 포함되어 있으며, 1776년의 필사본과 1794년의 시집에는 같은 이름의 나라 시인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러나 시간적 근접성을 제외하고는 샤라쿠 작가와의 연관성을 확립할 증거는 없다. 1790년의 신토 문서에는 가타야마 샤라쿠(片山写楽)라는 이름이 오사카의 종파 제자의 남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자세한 정보는 알려져 있지 않다. 샤라쿠의 역동적인 가부키 초상화가 오사카 기반의 동시대 작가인 류코사이와 니초사이의 초상화와 유사하다는 점은 오사카 지역 출신이라는 설을 뒷받침한다.

1789년과 1790년에 "샤라쿠사이"라는 필명이 새겨진 희귀한 달력 판화가 나타났지만, 기존의 샤라쿠의 작품과 뚜렷한 양식적 유사성은 거의 없다.

샤라쿠의 판화는 노 극의 가면과 유사하다는 주장이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샤라쿠가 현대의 도쿠시마현에 있는 아와국 영주를 섬기는 노 배우였다는 것을 암시하는 문서들을 발견했다. 이러한 문서에는 1804년에서 1807년 사이에 샤라쿠가 사망했음을 시사하는 내용이 있으며, 1806년 5월 17일을 명시하는 메이지 시대의 필사본과 그의 무덤이 에도 아사쿠사의 가이젠지(개선사) 절에 안치되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샤라쿠가 노 배우 사이토 주로베(斎藤十郎兵衛)였거나, 하루토 지자에몬(春藤次左衛門) 또는 하루토 마타자에몬(春藤又左衛門)이었다는 설도 있다.

1968년 유라 테츠지(由良哲次)는 샤라쿠가 호쿠사이였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우키요에 루이코''(浮世絵類考)에서도 발견되며, 샤라쿠의 판화는 호쿠사이의 생산성이 감소한 시기에 나타났다. 호쿠사이는 샤라쿠가 등장하기 전 100점 이상의 배우 초상화를 제작했는데, 1794년에 중단되었다. 호쿠사이는 그의 긴 경력 동안 수십 번이나 예명을 변경했다. 간세이 개혁 하의 정부 검열은 그가 다른 작품과 배우 초상화를 구별하기 위해 이름을 선택하도록 동기를 부여했을 수 있다. 우키요에 작가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목판을 조각하지 않기 때문에, 조각가의 변화가 선의 품질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

다른 제안된 정체성에는 샤라쿠의 출판인 츠타야 또는 츠타야의 장인, 우타마로, 우타가와 도요쿠니, 또는 마루야마 오쿄와 같은 예술가, 화가이자 시인인 타니 분초, 작가 타니 소가이(谷素外), 익명의 네덜란드 예술가 또는 실제로 세 사람이 포함된다. 또 다른 제안된 정체성은 작가 산토 쿄덴(山東京伝)이다. 타니 미네조(谷米蔵)는 샤라쿠의 짧은 경력이 1793년경 아내 키쿠조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슬픔으로 게사쿠(戯作) 쓰기를 잠시 중단한 쿄덴과 일치한다는 점을 지적한다.[1]

3. 작품 활동 및 화풍

우키요에는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에도 시대 일본에서 번성했던 미술 양식이다. 주로 유녀, 가부키 배우 등을 주제로 삼았으며, 대량 생산된 목판화가 이 장르의 주요 형태였다.[6] 우키요에는 사회 계층의 최하층에 있는 상인들, 특히 에도 (현재의 도쿄)를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진지한 예술로 간주되지 않았다.[7]

슌코의 ''오쿠비 야쿠샤에'' 배우 초상화의 선구자, ''이치카와 몬노스케 2세, 소가노 고로'' (1789)


18세기 중반 이후, 여러 색깔 판을 사용한 ''니시키에'' 판화가 흔해졌다.[8] 18세기 후반은 우키요에 작품의 전반적인 품질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로 평가받는다.[9] 슌쇼는 1760년대에 가쓰카와파에서 ''오쿠비에''(대두 그림)를 도입했다.[10] 슌쇼와 가쓰카와파 화가들은 ''오쿠비 야쿠샤에'' 배우 판화를 대중화했고, 배경에 운모를 뿌려 반짝이는 효과를 냈다.[11] 이전의 배우 판화와는 달리, ''오쿠비 야쿠샤에''는 배우와 흡사하게 그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12]

도슈사이 샤라쿠의 작품은 간세이 시대(1789–1801) 중반, 군사 정부가 간세이 개혁과 같은 반동 정책으로 어려운 경제 상황에 대응하던 시기에 나타났다. 일부 정책은 사치스러운 유행을 제한했고, 가부키 극장은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도 시대 후기의 예술은 번성했으며, ''야쿠샤에''는 배우의 개성을 더 강조하게 되었다.[13]

2대 사와무라 요도고로의 가와라 겐포와 초대 반도 젠지의 오니 사도보 (간세이 6년 5월 가와라자에서 상연된 『요시츠네 센본자쿠라』에서)

3. 1. 작품 활동

140점이 넘는 판화가 샤라쿠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대부분은 배우의 초상화 또는 가부키 극장의 장면이고, 나머지는 스모 선수나 무사의 그림이 대부분이다. 판화는 일반적인 인쇄 크기인 ''아이반'', ''호소반'', ''오반''으로 제작되었다. 이 작품들은 4개의 시기로 나뉜다. 처음 두 시기의 판화는 "도슈사이 샤라쿠"로 서명되었고, 후반 두 시기는 "샤라쿠"로만 서명되었다. 인쇄 크기는 점차 작아졌고, 초점은 흉상에서 전신 초상화로 옮겨졌다. 묘사는 덜 표현적이고 더 관습적이 되었다. 17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두 개의 그림 달력과 1803년까지 제작된 세 개의 장식된 부채가 샤라쿠의 작품으로 여겨지지만, 아직 그의 진품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샤라쿠의 명성은 주로 초기 판화에 기인하며, 1794년 11월 이후의 작품들은 예술적으로 열등하다고 여겨진다.[6]

에너지와 역동성은 우키요에의 전형적인 이상화된 아름다움보다는 샤라쿠 초상화의 주요 특징이다. 샤라쿠는 큰 코나 늙은 배우의 주름과 같은 돋보이지 않는 특징을 강조한다.

그의 배우 판화에서 샤라쿠는 대개 얼굴 표정에 초점을 맞춰 한 명의 인물을 묘사한다. 나라자키 무네시게에 따르면 샤라쿠는 "장면이나 공연의 절정을 이루는 단일 순간의 행동에서 드러나는 두세 가지 수준의 성격을 하나의 판화에 묘사"할 수 있었다. 가쓰카와 슌에이와 같은 동시대 화가들이 묘사된 연극에서 자신의 대상의 서사적 순간을 강조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샤라쿠는 배우와 캐릭터의 심리에 초점을 맞춰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벨에 따르면 "거의 캐리커처 같은 과장, 연극적 몸짓에 대한 고조된 감각"을 전달했다. 때때로 두 인물이 등장하여 서로 다른 얼굴 모양이나 아름다운 얼굴과 더 평범한 얼굴과 같은 유형의 대조를 보여준다.

대부분의 우키요에 화가들은 토리이파나 우타가와파와 같은 예술 학교에서 일하면서 견습 경험과 인맥을 쌓았다. 샤라쿠는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성공하기에 충분한 관객을 찾지 못하는 데 기여했을 가능성이 크다. 샤라쿠는 판화를 디자인한 이전 경험에 대한 증거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장의 솜씨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판화부터 샤라쿠의 판화는 기술적 선두 주자들 사이에 나타났으며, 대상의 비정상적으로 사실적인 묘사와 배경에 운모를 뿌리는 것과 같은 사치스러운 기술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러한 시작에서 그의 작품의 질은 빠르게 퇴색된다.

샤라쿠는 간세이 6년(1794년) 5월부터 이듬해 간세이 7년(1795년) 1월에 걸쳐 약 10개월 동안 (간세이 6년에는 윤달 11월이 있음) 145점 이상의 작품을 발행했다.

간세이 6년 5월에 간행된 운모(키라즈리), 대판 28장의 배우 대두 그림은 데포르메를 구사하여 눈의 주름, 매부리코, 아래턱 등 얼굴의 특징을 과장하여 그 배우가 가진 개성을 대담하고 교묘하게 묘사했으며, 또한 표정이나 포즈도 다이내믹하게 묘사한 지금까지 없었던 유니크한 작품이었다. 그 개성적인 작품은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 않을 수 없다. 대표작으로 "이치카와 에비조의 다케무라 사다노신", "3대 사카타 한고로의 후지카와 스이우에몬", "3대 오타니 오니지의 노 에도 병위"[6], "아라시 류조의 돈 빌려주는 이시베 킨키치" 등이 있다. 이 시기의 낙관은 모두 "도슈사이 샤라쿠 화"이다.

간세이 6년 7월부터 간행된 운모, 대판 7장의 두 사람 서 있는 전신상, 1장의 한 사람 서 있는 그림 및 세반의 단색 배경에 의한 한 사람 서 있는 그림 30장으로 이루어진 제2기의 낙관은 "도슈사이 샤라쿠 화"이다. 모두 긴장감 있는 화면 구성이었다. 간세이 6년 11월부터의 제3기는 얼굴 보기 광대에 대한 작품 58점, 배우 추선 그림 2점, 스모 그림 2종 4점 (3장 연속 1종과 1장 그림 1종) 총 64점을 제작, 간판 14점 및 대판 3장 연속 스모 그림을 제외한 47점은 모두 세반이었다. 어느 작품도 운모는 사용하지 않고 배경의 묘사가 담겨 있으며, 그 배경이 연속된 조형물이 많다. 예술적인 격조는 낮고, "도슈사이 샤라쿠 화" 및 "샤라쿠 화"의 2종의 낙관이 보인다. 제4기는 간세이 7년 정월의 미야코좌, 기리좌의 광대를 그린 세반 10장 외, 대판 스모 그림 2장, 무자 그림 2장 총 14점을 간행, 낙관은 모두 "샤라쿠 화"이다.

배우 그림은 기본적으로 그림 속에 그려진 배우의 정문이나 배역 역할 등에서 그 배우가 그 역할로 출연했던 연극의 상연 시기를 월 단위로 특정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에 의해 작화 시기를 검증하는 것이 현재 샤라쿠 연구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샤라쿠 작품은 모두 쓰타야 주자부로의 가게에서 출판되었다. 그 그림의 발표 시기는 4기로 나뉘어져 있으며, 제1기가 간세이 6년(1794년) 5월 (28장, 모두 대판의 흑운모(구로키라즈리) 대두 그림), 제2기가 간세이 6년 7월·8월 (두 사람이 서 있는 배우 전신상 7장, 락커(Locker)의 그림 1장, 세 그림 30장), 제3기가 간세이 6년 11월·윤달 11월 (얼굴 보기 광대를 그린 것 44장, 간판 대두 그림 10장, 추선 그림 2장), 제4기 (봄 광대를 그린 것 10장, 스모 그림 2장을 섞음)가 간세이 7년(1795년) 1·2월로 여겨진다. 샤라쿠의 대표작이라고 하는 것은 대두 그림의 제1기의 작품이다. 뒤로 갈수록 급격하게 힘의 감퇴가 인정되어, 정취를 잃고, 작품에서의 회화적 재능이나 판화로서의 품질은 떨어진다. 전기 (1, 2기)와 후기 (3, 4기)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작풍이 다르기 때문에, 전기와 후기에는 다른 사람이 그렸고, 너무 짧은 기간 안에 많은 그림이 간행된 것도 함께 공방에 의해 작품이 만들어졌다는 설도 있다.

작품 총수는 배우 그림이 134장, 배우 추선 그림이 2장, 스모 그림이 7장, 무사 그림이 2장, 에비스 그림이 1장, 배우 판본 하 그림이 9장, 스모 판본 하 그림이 10장 확인되었다. 2008년에 샤라쿠 작으로 보이는 육필의 배우 그림이 확인되었다.

샤라쿠의 배우 그림에는 가쓰카와 슌쇼, 토리이 기요나가, 가쓰카와 슌코, 가쓰카와 슌에이 및 상방의 류코사이 뇨케, 가노파, 소가파 등의 화풍의 영향이 지적되고 있다.

thumb의 가와라 겐포와 초대 반도 젠지의 오니 사도보 (간세이 6년 5월 가와라자에서 상연된 『요시츠네 센본자쿠라』에서)]]

; 작품 목록

상연 장소작품명판형제작 시기비고
도좌(都座) 『경성 삼본 우산(傾城三本傘)』「3대 세가와 키쿠노조의 경성 카츠라기(傾城かつらぎ)」세반(細判)간세이 6년현존 확인 수 6점
도좌(都座) 『경성 삼본 우산(傾城三本傘)』「2대 아라시 류조의 후와가 시모베 우키요 마타헤이(不破が下部浮世又平)」세반(細判)간세이 6년현존 확인 수 3점
도좌(都座) 『경성 삼본 우산(傾城三本傘)』「시노즈카 우라에몬의 도좌 구치죠즈(篠塚浦右衛門の都座口上図)」오반(大判)간세이 6년
키리좌(桐座) 『신령 야구치노와타시(神霊矢口渡)』, 『사방금 고향 여로(四方錦故郷旅路)』「8대 모리타 칸야의 유라 효고노스케 노부타다(由良兵庫之介信忠)」세반(細判)간세이 6년현존 확인 수 5점
키리좌(桐座) 『신령 야구치노와타시(神霊矢口渡)』, 『사방금 고향 여로(四方錦故郷旅路)』「3대 이치카와 코레조의 카메야 츄베이와 나카야마 토미사부로의 신마치의 케이세이 우메카와(亀屋忠兵衛と中山富三郎の新町のけいせい梅川)」오반(大判)간세이 6년
카와라자키좌(河原崎座) 『니혼마츠 무츠 오이오이(二本松陸奥生長)』「3대 오오타니 오니지의 카와시마 지부고로(川島治部五郎)」세반(細判)간세이 6년
카와라자키좌(河原崎座) 『니혼마츠 무츠 오이오이(二本松陸奥生長)』「이치카와 단조조의 토미타 뵤타로(富田兵太郎)」세반(細判)간세이 6년
키리좌(桐座) 『남자마(男山) 어에도 반석(御江戸盤石)』「덴노지야 리코(天王寺屋里好)」간판(間判)
키리좌(桐座) 『남자마(男山) 어에도 반석(御江戸盤石)』「3대 세가와 기쿠노조의 야마토 만자이(大和万歳) 실은 시라뵤시(白拍子) 히사카타(久かた)」호소반(細判)
키리좌(桐座) 『남자마(男山) 어에도 반석(御江戸盤石)』「2대 나카무라 나카조의 사이조(才蔵) 실은 아라마키 미미시로(荒巻耳四郎)」호소반(細判)
키리좌(桐座) 『남자마(男山) 어에도 반석(御江戸盤石)』「6대 이치카와 단주로의 아라카와 타로(荒川太郎)」간판(間判)
키리좌(桐座) 『남자마(男山) 어에도 반석(御江戸盤石)』「2대 나카지마 산포에몬과 나카무라 토미주로 2대 이치카와 몬노스케」간판(間判)2장 연작
「오와라야마 도효이리(大童山土俵入り)」오반(大判)3장 연작, 스모 그림
「이치카와 에비조의 쿠도 스케츠네, 3대 이치카와 야오조의 주로 스케나리, 6대 이치카와 단주로의 고로 토키무네」세로(細判)3장 연작
「오와라야마의 도깨비 퇴치」오반(大判)



2008년, 그리스 국립 코르푸 아시아 미술관이 소장한 우키요에 컬렉션에 대해 일본 연구자가 학술 조사를 실시한 결과, 샤라쿠의 서명이 있는 육필 부채 그림 '4대 마츠모토 코시로의 카코가와 혼조와 마츠모토 요네자부로의 코나미'가 확인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림의 장면은 간세이 7년 5월(1795년 6월)에 에도 가와라자키 좌에서 상연된 '가나데혼 주신구라'의 배역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종래 샤라쿠가 모습을 감춘 것으로 여겨졌던 1795년 초 이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이 육필 부채 그림의 감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도 있다.

3. 2. 화풍

우키요에는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에도 시대 일본에서 번성했던 미술 양식이다. 주로 유녀, 가부키 배우 등을 주제로 삼았으며, 대량 생산된 목판화가 이 장르의 주요 형태였다.[6] 우키요에는 사회 계층의 최하층에 있는 상인들, 특히 에도 (현재의 도쿄)를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진지한 예술로 간주되지 않았다.[7]

18세기 중반 이후, 여러 색깔 판을 사용한 ''니시키에'' 판화가 흔해졌다.[8] 18세기 후반은 우키요에 작품의 전반적인 품질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로 평가받는다.[9] 슌쇼는 1760년대에 가쓰카와파에서 ''오쿠비에''(대두 그림)를 도입했다.[10] 슌쇼와 가쓰카와파 화가들은 ''오쿠비 야쿠샤에'' 배우 판화를 대중화했고, 배경에 운모를 뿌려 반짝이는 효과를 냈다.[11] 이전의 배우 판화와는 달리, ''오쿠비 야쿠샤에''는 배우와 흡사하게 그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12]

도슈사이 샤라쿠의 작품은 간세이 시대(1789–1801) 중반, 군사 정부가 간세이 개혁과 같은 반동 정책으로 어려운 경제 상황에 대응하던 시기에 나타났다. 일부 정책은 사치스러운 유행을 제한했고, 가부키 극장은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도 시대 후기의 예술은 번성했으며, ''야쿠샤에''는 배우의 개성을 더 강조하게 되었다.[13]

샤라쿠는 1794년(간세이 6년) 5월부터 1795년(간세이 7년) 1월까지 약 10개월 동안 145점 이상의 작품을 발행했다. 간세이 6년 5월에 간행된 운모(키라즈리)를 사용한 대판 28장의 배우 대두 그림은 데포르메를 통해 눈 주름, 매부리코, 아래턱 등 얼굴 특징을 과장하여 배우의 개성을 대담하고 교묘하게 묘사했으며, 표정이나 포즈도 역동적으로 묘사한 독특한 작품이었다. 대표작으로는 "이치카와 에비조의 다케무라 사다노신", "3대 사카타 한고로의 후지카와 스이우에몬", "3대 오타니 오니지의 노 에도 병위"[6], "아라시 류조의 돈 빌려주는 이시베 킨키치" 등이 있다.

간세이 6년 7월부터 간행된 제2기 작품은 긴장감 있는 화면 구성이 특징이다. 간세이 6년 11월부터의 제3기는 예술적인 격조가 낮고, "도슈사이 샤라쿠 화" 및 "샤라쿠 화" 두 종류의 낙관이 보인다. 제4기는 간세이 7년 정월에 미야코좌, 기리좌의 광대를 그린 세반 10장, 대판 스모 그림 2장, 무자 그림 2장 등 총 14점을 간행했으며, 낙관은 모두 "샤라쿠 화"이다.

샤라쿠의 대표작은 대두 그림인 제1기 작품이다. 뒤로 갈수록 작품의 회화적 재능이나 판화 품질은 떨어진다. 전기(1, 2기)와 후기(3, 4기)의 작풍이 매우 달라 공방에서 작품을 제작했다는 설도 있다. 샤라쿠 작품은 모두 쓰타야 주자부로의 가게에서 출판되었다.

thumb의 가와라 겐포와 초대 반도 젠지의 오니 사도보 (간세이 6년 5월 가와라자에서 상연된 『요시츠네 센본자쿠라』에서)]]

4. 평가 및 영향

東洲斎 写楽|도슈사이 샤라쿠일본어의 작품은 에도 시대 대중에게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43] 크고 첫 번째 시기의 작품이 더 많이 남아 있는데, 이는 나중 작품보다 더 인기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단 한 점만 남아 있는 작품의 대부분은 후기 작품에서 비롯되었다.[44]

상대적으로 사실적인 스타일로 작업한 우타마로와 같은 동시대 인물들은 대상의 긍정적이고 미화된 모습을 표현했다. 샤라쿠는 대상의 덜 긍정적인 측면을 묘사하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19세기 미술사학자 어니스트 페놀로사에게 "저속함의 대가"였다. 우타마로가 1803년에 그린 초상화의 비문은 샤라쿠의 접근 방식에 대한 비판을 겨냥한 것으로 보이며, 샤라쿠의 행방불명 이후 8년 만에 나타난다는 것은 그의 불인정에도 불구하고 샤라쿠의 존재감이 여전히 느껴졌음을 시사한다.[45]

짓펜샤 잇쿠의 저서 ''쇼토잔 테나라이 호조''(1796)에 삽화로 등장하는 장식된 연에는 가부키 배우 이치카와 에비조 4세의 샤라쿠 그림이 나타나고, 그에 따른 텍스트는 샤라쿠 후기 작품의 쇠퇴와 우키요에 세계에서 그의 이탈을 둘러싼 사건에 대한 해설로 해석되는 말장난, 전문 용어, 이중 의미로 가득 차 있다.[46] 여기에는 그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는 추측도 포함된다.[47] 잇쿠는 1794년 말부터 샤라쿠의 출판사 츠타야에서 출판했고, 이 책은 샤라쿠를 언급한 가장 초기의 책이다.[48] 우키요에에 관한 가장 오래된 현존하는 작품인 ''우키요에 루이코''에는 샤라쿠의 작품에 대한 가장 오래된 직접적인 언급이 포함되어 있다.[49]

''우키요에 루이코''는 출판된 책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쳐 손으로 필사된 원고였으며, 내용에 큰 변동이 있었고, 그 중 일부는 샤라쿠의 정체성에 대한 추측을 부추겼다.[50] 시키테이 산바는 1802년에 우키요에 화가들에 대해 썼고, 활동 중인 화가와 비활동 중인 화가 및 그들의 학교를 지도 형태로 묘사한 삽화를 포함했다. 샤라쿠는 추종자가 없는 고독한 섬으로 묘사된 비활동 중인 화가로 등장한다.[51]

샤라쿠의 작품은 유럽 수집가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지만,[52] 독일 수집가 율리우스 쿠르트의 책 ''샤라쿠''가 1910년에 출판되기 전까지는 인쇄물에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53] 쿠르트는 샤라쿠의 초상화를 렘브란트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작품과 동등하게 평가했으며,[54] 샤라쿠가 노 배우 사이토 주로베이라고 주장했다.[55] 이 책은 이 예술가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그 결과 샤라쿠를 가장 위대한 우키요에 거장 중 한 명으로 평가하는 재평가가 이루어졌다.[56]

샤라쿠의 판화는 600점 정도가 알려져 있으며, 일본에는 약 100점만 남아 있다.[57]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기 때문에 샤라쿠의 작품에 대한 일반적인 연구는 일본과 서양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어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일본 연구자들은 샤라쿠의 시대와 관련된 문서와 문헌에 대해 더 잘 알고 있고 접근할 수 있다. 반면에 샤라쿠의 작품은 서양 컬렉션에 소장되는 경향이 있으며, 단 한 점만 알려진 판화도 있는데, 이 중 약 30점 정도가 있다.[58]

샤라쿠의 ''이시베 킨키치로서의 아라시 류조 1세''는 1975년 소더비에서 25000USD에, 1989년 크리스티에서 22000GBP에, 2009년 파리의 Piasa프랑스어에서 389000EUR에 팔려 샤라쿠 판화의 경매 최고가를 기록했다.[59]

소비에트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은 객관적인 현실주의가 유일하게 유효한 표현 수단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는 샤라쿠가 "정상성을 거부"했으며,[60] 엄격한 현실주의와 해부학적 비례에서 벗어나 표현적이고 감정적인 효과를 얻었다고 생각했다.[61]

1995년 시노다 마사히로는 샤라쿠의 경력을 소설화한 영화 ''샤라쿠''를 감독했다.[62]

율리우스 쿠르트가 저서 『''Sharaku''』에서 샤라쿠를 렘브란트나 벨라스케스와 함께 "세계 3대 초상 화가"로 칭찬하여, 이를 계기로 다이쇼 시대부터 일본에서도 그 평가가 높아졌다는 설명이 널리 퍼져 있다.[63] 그러나 『''Sharaku''』의 1910년 간행 초판, 1922년 간행 개정 증보판, 및 1994년 간행의 일본어 번역판 『샤라쿠 SHARAKU』 어느 곳에서도 쿠르트에 의한 서문 및 본문에 "세계 3대 초상 화가", "렘브란트", "벨라스케스"에 관한 기술은 찾아볼 수 없다.[64]

기시 후미카즈 (도지샤 대학 문학부)는 2002년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65]

『샤라쿠 SHARAKU』의 일본어 번역을 담당했던 사다무라 타다시는, 1995년에 다른 서적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66]

오이카와 시게루는 "이런 문장은 쿠르트의 저작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후세의 분식의 기미가 있다"라고 단언하고 있다.[67]

미술 편집자 도미타 요시카즈는 '''「쿠르트의 『샤라쿠』에서는 한마디도 쓰여 있지 않은 문구가, 일본인의 누군가에 의해, 쿠르트의 샤라쿠관을 상징하는 말로서 만들어져, 널리 퍼져, 어느샌가 연구자들 사이에서 돌려 쓰이게 된다」'''는 사태가 일어났다고 논하고 있다.[68]

참조

[1] 서적 Sharaku shinkō: Sharaku wa Kyōden datta! Bungei shunshū
[2] 논문
[3] 논문 写楽:特別展
[4] 논문
[5] 논문 フィラデルフィア
[6] 웹사이트 ACジャパン 2015年度 日本脳卒中協会 支援キャンペーン「写楽」CM https://www.youtube.[...] 2016-07
[7] 웹사이트 Actors from right, Ichikawa Yaozō III, Sawamura Sōjūrō III, and Osagawa Tsuneyo II, drawing for an unpublished book http://www.mfa.org/c[...]
[8] 웹사이트 http://www.artic.edu[...]
[9] 논문 ギメ東洋美術館所蔵
[10] 논문
[11] 서적 浮世絵類考 岩波書店
[12] 논문
[13] 문서 御触書天保集成
[14] 웹사이트 本朝画家人名辞書. 下 https://dl.ndl.go.jp[...]
[15] 웹사이트 Dessins, estampes, livres illustrés du Japon https://gallica.bnf.[...]
[16] 논문
[17] 논문
[18] 논문
[19] 논문 大武者絵展
[20] 논문 写楽歌麿同人説 福岡市美術館
[21] 서적 写楽を捉えた―浮世絵新発見 画文堂
[22] 방송 池田満寿夫推理ドキュメント 謎の絵師・写楽 NHK
[23] 서적 写楽
[24] 뉴스 写楽実は俳人谷素外 読売新聞 1969-10-16
[25] 서적 写楽―まぼろしの天才 新人物往来社
[26] 잡지 東洲斎写楽はオランダ人だった / 写楽は司馬江漢+Xだ! 芸術公論, 歴史読本
[27] 문서
[28] 웹사이트 江戸方角分 -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https://dl.ndl.go.jp[...] 2021-05-30
[29] 뉴스 朝日新聞 1997-07-03
[30] 논문
[31] 서적 写楽 中公新書
[32] 웹사이트 越谷市公式ホームページ https://www.city.kos[...]
[33] 논문 東洲斎写楽・斎藤十郎兵衛同人説への疑義 九州藝術学会
[34] 논문 栄松斎長喜:その画業と実像に迫る 太田記念美術館
[35] 논문
[36] 문서 第3期間版役者絵11枚を除く
[37] 서적 1985
[38] 웹사이트 扇面お多福図 http://www.artic.edu[...]
[39] 서적 写楽の肉筆扇面画 2009
[40] 서적 歌舞伎事典 2011
[41] 서적 2012
[42] 서적 歌舞伎大事典 2012
[43] 웹사이트 日本語版 https://www.adachi-h[...] アダチ版画研究所
[44] 웹사이트 Utamaro https://archive.org/[...] F.A. Brockhaus
[45] 서적 1995
[46] 서적 うき世と浮世絵 東京大学出版会 2017-04-28
[47] 서적 ごあいさつ 2009
[48] 학술지 井上和雄氏の資料「雨石ノート」より 写楽〈クルト〉1 https://doi.org/10.3[...] 1979
[49] 서적 1994
[50] 서적 浮世絵の解剖図鑑 エクスナレッジ 2020
[51] 학술지 西洋近代が見た日本近世――クルトの『SHARAKU』に潜む《暴力》について―― 同志社大学人文科学研究所 2002-01
[52] 학술지 浮世絵研究の功罪 : 近代における浮世絵受容とその波紋 https://doi.org/10.2[...] 神戸大学美術史研究会 2018-02
[53] 서적 決定版写楽 : 幻の絵師の正体 学習研究社 1995
[54] 서적 2012
[55] 서적 江戸芸術論 岩波文庫 2000
[56] 웹사이트 写楽 https://dl.ndl.go.jp[...]
[57] 서적 「写楽」を教えてくれたクルト-100年目の新事実-
[58] 웹사이트 アルス美術叢書. 第23編 https://dl.ndl.go.jp[...]
[59] 학술지 海外事情 最近の欧文による浮世絵研究文献 連載一 https://doi.org/10.3[...] 2008
[60] 서적 プロジェクト写楽 新説 江戸のキャラクター・ビジネス 武田ランダムハウスジャパン 2011
[61] 학술지 東洲斎写楽「伝説」考 歴研 2019-10
[62] 서적 知られざる鬼才天才 春秋社 1965
[63] 서적 2008
[64] 서적 The Japanese Print: A Historical Guide https://archive.org/[...] Weatherhill 1982
[65] 서적 Toshusai Sharaku C.E. Tuttle社 1955
[66] 웹사이트 Exposición de Sharaku en el Museo Nacional de Tokio http://www.kawaiikak[...]
[67] 서적 女坂界隈 大西書店 1976
[68] 서적 東洋の名画 造形社 1965
[69] 학술지 写楽に就て 浮世絵同好会 1937-04
[70] 서적 台東風俗文化史 東京都台東区役所 1958
[71] 서적 The Floating World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54
[72] 웹사이트 歌舞伎、その浮世絵に描かれた華麗な美の世界! https://syukatsulabo[...]
[73] 논문 2006
[74] 웹인용 샤라쿠 별인(別人)설 모음 http://www.hat.hi-ho[...] 2018-07-14
[75] 뉴스 “화가 김홍도가 연풍 현감이었어요” http://www.cbinews.c[...]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